개인 이름 이도, 세종대왕은 조선 왕조의 네번째 통치자이다. 처음에는 충년대군, 태종대왕후와 원경왕후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맡형인 이제왕세자를 대신하여 후계자로 지정되었다. 오늘날 세종대왕은 한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도자 중 한명으로 여겨진다.
1418년 아버지의 자발적인 퇴위 이후 왕위에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세종은 단순한 왕에 불과했다. 태종은 1422년 사망할 때까지 계속해서 실권을 잡고 나라를 통치했다. 세종은 그 후 28년 동안 유일한 군주였지만 1439년 이후 점점 병들었고, 1442년부터 그의 장남인 이향태자(미래의 문종)가 섭정을 맡았다.
세종은 한국의 유교와 신유교 정책을 강화하고 주요 법률 개정안을 제정했다. 그는 독자적이고 창조적인 한글을 만들고 공포했으며, 과학 기술의 발전을 장려하고 경제 성장을 촉진하기 위한 조치를 도입했다. 그는 북쪽에 군사 작전을 파견하고 새로운 정착민을 유치하기 위해, 남쪽에서 그는 일본해적을 정복하려 하였다.
세종은 태종왕의 부인 원경왕후의 아들이였다. 열 두살때 충년대군이 되었다. 어린시절에 그는 두 형보다 아버지의 총애를 받았다.
왕의 셋째 아들로서 그의 왕위 계속은 톡특하다. 태종의 장남 이제는 1404년 후계자로 지명되었으나 그의 자유로운 성격과 사냥과 여가 활동에 대한 선호로 인해 1418년 8월에 그 자리에서 물러났다.
세종을 위해 퇴위했다고 하지만 확실한 기록은 없다. 태종의 둘째 아들인 효령대군은 남동생의 승격으로 불교 승려가 되었다. 이제의 강등 이후 태종은 셋째 아들의 후계자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 재빨리 움직였고, 정부는 그 변화에 동의하지 않는 관리들을 숙청했다. 1418년 태종은 퇴위했다. 그러나 은퇴후에도 그는 정부 정책에 계속 영향을 미쳤다. 세종의 놀라운 정치적 기술과 창의력은 아버지가 사망한 후에야 드러났다.
조선 초기의 경제는 가장 일반적인 통화 형태인 물물교환 시스템을 기반으로 했다.
1423년 세종대왕의 통치 아래 정부는 당나라를 모델로 한 국가 통화를 개발하려고 시도했다. 조선은 은본위제로 뒷받침되는 청동 동전으로 150개의 동전은 은 600g과 같았다. 조선 통보의 생산은 1425년에 너무 비싸서 만들 수 없었고 환율은 동전의 내재 가치보다 낮았기 때문에 중단되었다.
세종대왕은 유능한 군사 계획가였다. 그는 국가의 안전을 강화하기 위해 다양한 군사 규정을 만들었고, 대포 개발을 포함한 군사 기술의 발전을 지원했다. 다양한 종류의 박격포와 화살과 화약사용이 테스트 되었다.
1419년 세종은 아버지의 조언과 지도로 오에이 침공에 착수했다. 이 군사 원정의 궁극적인 목표는 쓰시마 섬 근처에서 활동하고 있던 일본 해적들을 제거하는 것이었습니다. 침공 중에 110명의 일본인이 사망하고 180명이 전투에서 포로로 잡혔으며 150명의 군인이 사망했습니다. 146명 이상의 납치피해자도 해방되었다. 1443년 휴전이 이루어지고 조선군이 한반도로 돌아왔지만 공식문서에 서명하지 않았다. 계해 조약으로 알려진 이 협정에서 쓰시마의 다이묘는 조선 왕에게 조공을 바치겠다고 약속했고, 그 대가로 조선 궁정은 소씨족에게 양국 간의 무역에 관한 우선권을 보상했습니다.
1433년 세종은 저명한 장군인 김종서를 북쪽으로 보내 여진족을 멸망시켰다. 김씨의 군사 작전은 여러 요새를 점령하고 북쪽으로 진격하여 한국 영토를 송화강으로 확장했다.
1420년 세종대왕은 과학에 대한 사랑으로 경복궁 내에 집현전으로 알려진 연구소를 만들었다. 이 연구소는 국가의 기술 발전을 목적으로 과학 연구를 수행할 책임이 있었다. 집현전은 조선에서 가장 훌륭하고 똑똑한 사상가들의 모임으로 정부는 젊은 학자들의 참석을 장려하기 위해 보조금과 장학금을 제공했다.
세종은 과학을 장려했다. 그는 농부들을 돕고 싶어서 농부 핸드북을 만들기로 결정했다. 농사직설이라는 책은 한국 각지의 과학자들이 수집한 다양한 농업기술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었다 .이러한 기술은 새로 채택된 집중적이고 지속적인 재배 방법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했다.
그의 가까운 동료 중 한명은 위대한 발명가 장영실이였다. 젊은 시절 장양실은 타고난 창의적이고 똑똑한 사상가였다. 세종은 그의 솜씨를 눈치채고 즉시 그를 한성에 있는 자신의 궁으로 불렀다. 장영실에게 정부 지위와 그의 발명품에 대한 자금을 제공하자 관리들은 하층 계급의 사람이 귀족들 사이에서 권력을 잡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며 항의했다. 대신 세종은 자신의 능력 때문에 지원을 받을 가치가 있다고 믿었다. 장영실은 물시계, 구체, 해시계에 대한 새로운 중요한 디자인을 만들었다.
1442년 장영실은 세계 최초의 표준화된 우량계 중 하나인 측우기를 만들었다. 이 모델은 영조왕 통치 기간인 1770년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한국 우량계가 만들어지면서 살아남지 못했다. 왕실 사무국의 일일기록에 따르면 영조는 세종대왕의 영광스러운 시대를 되살리고 싶어서 그 시대의 연대기를 읽었다. 우량계에 대한 언급을 접했을때 영조는 복제품을 주문했다. 1735년에 청나라 통치자 건륭의 포시가 있기 때문에 이 한국에서 디자인한 우량계는 때때로 중국에서 수입된 것으로 오해된다.
1434년 장영실은 세종대왕의 임무를 받아 새로운 형태의 인쇄기인 갑인자를 발명했다. 이 인쇄기는 이전 모델보다 두배 빠르면 구리-아연 및 납-주석 합금으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세종은 또한 당시 중국 수도를 경도를 기반으로 했던 한국 달력 시스템을 개혁하기를 원했다. 그는 천문학자들에게 조선의 수도 한성을 25차 자오선으로 하는 달력을 만들게 했다. 이 새로운 시스템을 통해 조선 천문학자들은 일식과 월식의 시기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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